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이안 시대 (문단 편집) === 후기 === 후기(1068~1192)부터 섭관가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목적으로 [[천황]]이 양위하여 '''[[상황|조고]]'''(상황, 태상천황太上天皇(다이조 덴노)의 약어. 사실상 죠-코라고 읽는다.)로서 원정(院政, [[인세이]])을 펼쳤다. 사실 양위 자체는 [[간무 덴노]](재위 781~806) 다음인 [[헤이제이 덴노]](재위 806~809) 때부터 있었을 만큼 흔했다. 하지만 그 직후 '''구스코의 변'''(810)으로 [[나라시|헤이죠쿄]]로 다시 복귀하려는 헤이제이 조고[* 그의 헤이조쿄('''平城'''京)에 대한 애착(?)때문인지 [[헤이제이 덴노]]('''平城'''天皇)의 [[시호#s-1.3|추호(追号)]]와 '''[[나라시|나라]]'''노미카도('''[[나라시|奈良]]'''帝)란 별칭은 헤이조쿄에서 유래했다.]의 계획이 [[사가 덴노]]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 출가하는 등 실체적인 힘을 가진 천황은 드물었다. 그러나 [[우다 덴노]](재위 887~897. 이후 출가) 이래 170년 만에 후지와라씨의 피가 섞이지 않은 [[고산조 덴노]](1034~1073, 재위 1068~1073)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고산조 덴노는 장원을 대거 정리하여 국가로 환수하고, 무너져가던 율령제도의 정비를 도모하였으며 그 수족으로서 중하류 귀족과 지방관들을 등용하는 등의 정책을 펴 국정을 안정시켰는데 이는 '''엔큐의 선정'''(延久の善政)으로 칭송받았다. 이로서 장원제의 폐단이 완화되었고, 국고가 충실해졌으며, 셋칸케의 경제적 기반이 약화되었다. 고산조 덴노는 자신의 자손이 황통을 잇게 하고자 하여 양위를 실행에 옮기는 도중 4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후 황위를 계승한 아들 [[시라카와 덴노]](재위 1073~1086, 상황으로 1086~1129)는 무려 아들 [[호리카와 덴노]](재위 1086~1107, 요절), 손자 [[도바 덴노]](재위 1107~1123, 이후 양위), 증손자 [[스토쿠 덴노]](재위 1123~1142)[* 사실 증손자가 아닌 시라카와 덴노의 사생아였다는 이야기가 당대 기록으로 있다. 이렇게 되면 스토쿠는 나이는 16살 어렸지만 사실상 도바의 어린 숙부뻘이 된다. 물론 정설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까지 3대 42년을 상황으로 있으면서 77세로 죽을 때까지 권력을 마음껏 휘둘렀다. 시라카와와 도바 재위시에는 후지와라 셋칸케(摂関家)에서 내분이 발생한 데다 그 씨장자가 어리거나 무능하여 그 위세를 꺾을 수 있었다. 여기에 [[스토쿠 덴노]]가 아직 어렸기에 권력은 새로운 인(院)이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도바도 역시 할아버지 시라카와가 죽은 1129년부터 1156년까지 27년간 실권을 휘둘렀다. 도바인은 자신의 장원 확대에 몰두하여 기존의 개혁을 무위로 돌렸으며, 민생 악화와 지방의 봉건화를 촉진시켰다. 율령에 기초한 조정 정치의 왜곡과 자의적인 측근정치, 상황의 사욕 추구는 민생의 악화와 함께 황실의 권위나 정치의 정당성도 점차 악화시켰다. 이때 조고(上皇)가 일종의 사병이었던 무사들에게 권력을 주면서 [[사무라이|무사]] 씨족이 성장하여, [[타이라]]씨와 [[미나모토]]씨가 두각을 나타내게 됐다. 그리고 그들이 상쟁한 결과 [[가마쿠라 막부]]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 시초라 할 수 있는 것이 도바 법황[* '호우오우'(호-오-, 法皇), 출가한 조고(상황). 공교롭게도 [[교황]]을 일본은 [[로마]] [[법왕]]이라고 한다.]의 죽음 직후 벌어진 도바의 아들 [[고시라카와 덴노]](後白河天皇)와 [[스토쿠 덴노|스토쿠 조고(崇德上皇)]] 사이의 무력충돌에서 천황 측이 승리한 1156년의 [[호겐의 난]](보원保元의 난)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10일간의 소규모 싸움에 불과했다. 졸지에 수괴가 된 스토쿠는 당시에도 실권이 없었고, 난의 정황도 몰라 아들 시게히토도 놔두고 도망갈 만큼 허둥거렸다. 되려 이 사건은 반도바 성향 무사들의 우발적인 사건에 가까웠다고 여겨지기도 하고, 반대파를 일소하려는 고시라카와 천황과 그 측근 신제이 등의 술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이후의 [[헤이지의 난]] 등이 겹치면서 황실의 권위는 약화되었고, 수도의 군사 치안권이 타이라 일족에게 집중되게 되었다. [[타이라노 키요모리]]를 필두로 하는 [[헤이케]]는 공경 외척 가문으로 승격했고, 수도 교토 인근의 무사들과 봉건적 주종관계를 확립했다. 또한 송나라와의 교역을 주선하며 막대한 부를 쌓아 황실이나 후지와라 가문을 능가하는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키요모리는 고시라카와 조고를 유폐시키고, 자신의 외손이었던 [[안토쿠 덴노]]를 옹립할 정도의 권세를 과시하였으나, 키요모리 사후 동국에서 궐기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무가정권을 수립하면서 헤이안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인세이]], [[타이라노 키요모리]],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항목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